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리베크 (문단 편집) == 감독 경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rich-ribbeck-als-junger-bundestrainer-er-trainiert-bis-1978-rw-essen-1967-1968-eintracht-frankfurt-1968-1973-und-den-1-fc-kaiserslautern-1973-1978-.jpg|width=100%]]}}} || 은퇴 후 1965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2시즌동안 코치직을 수행한다. 1967년 2부리그 소속인 로트바이스 에선의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2부리그에 속해있던 팀을 승격 플레이오프까지 진출시켰으나 헤르타 베를린에게 패배하여 승격에 실패한다. 그 이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1968/69시즌 부터 1972/73시즌까지 5시즌 동안 8-8-15-5-8위의 성적을 내며 중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1973/74시즌에는 [[1.FC 카이저슬라우테른]]의 감독으로 직을 옮긴다. 1977/78시즌까지 5시즌 동안 6-13-7-13-8위를 기록하며 꾸준히 중위권 성적을 기록한 리베크는 1977/78시즌이 끝나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된 [[유프 데어발]]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임명된다. 1984년까지 6년동안 유프 데어발 감독을 보좌하며 유로 1980에서는 우승,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을 이끌었다. 1984년 유로 1984에서 8강진출에 실패한 유프 데어발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대회 직후 사임했다. 6년 동안 수석코치로 활동한 에리히 리베크였기 때문에 감독직 후보로 올랐으나 1984년 독일 축구 협회는 [[프란츠 베켄바워]]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한다. 리베크는 그 이후 수석코치직을 사임한다. 사임 직후 1984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으로 임명된다. 1984/85시즌 리그 14위를 기록하며 한 시즌만에 도르트문트 감독직을 사임한다. 하지만 곧바로 그 다음시즌 1985/86시즌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부임 직후 85/86, 86/87시즌 연속 6위를 기록하며 [[UEFA 유로파 리그|UEFA CUP]]의 티켓을 따낸 리베크는 1987/88시즌 에이스 [[차범근]]을 앞세워 UE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 트로피를 든다. UEFA컵 우승이라는 최대의 성과를 낸 리베크는 우승을 차지한 뒤 감독직을 사임한다. 그 뒤 휴식을 취하던 리베크는 1992/93시즌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고 1995/96시즌에는 레버쿠젠으로 복귀했으나 리그 14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한 시즌만에 사임한다. 그렇게 야인으로 있으면서 잠정적으로 은퇴한 상황에 있다가 1998년 [[베르티 포크츠]] 감독에 이어 7번째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된다. [[https://cafe.daum.net/CM3Korea/2HOm/4042|당시 상황을 설명한 글]]에 따르면 당시 대표팀 감독 후보로 1순위는 아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본인도 처음엔 대표팀 감독 제의에 대해 생각지도 못해 당황스러웠겠지만 뭔가 아쉬운 자신의 감독 커리어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인데다가 몰락했다는 평가를 들은 독일 축구를 자신이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고심해서 생각한 끝에 대표팀 감독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유로 2000 예선에서 터키, 핀란드, 몰도바, 북아일랜드와 함께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첫 경기인 터키와의 경기에서는 0:1로 패배했으나 핀란드, 몰도바, 북아일랜드를 차례로 잡으면서 본선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예선 마지막경기에서 다시 만난 터키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터키와의 예선전 성적은 1무 1패. 유로 2000에서 8강 신화를 일으켰던 터키였던것을 감안하면 독일 국대의 유로 2000의 실패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당초 감독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리베크가 감독을 맡는 바람에 수석코치로 임명된 [[울리 슈틸리케]][* 의도야 어쨌든 보수적인 축구를 구사하던 리베크와는 달리 슈틸리케는 스페인, 스위스 등 외국에서 활동한 경험이 많아 기존의 독일 축구와는 다른 스타일, 이상과 방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은퇴하고 바로 스위스 국가대표 감독을 하는 등 이 때까지는 지도자로는 감독 경력만 있어서 보좌해주는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독일 축구협회에서는 둘이 과거 국가대표 코치와 선수로 함께 한 시절도 있어서 서로 잘 조화를 이룰 거라고 판단했던 모양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슈틸리케가 나간 뒤 유로 2000 본선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서 리베크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긴 했었으나 독일 축구협회가 리베크 대신 슈틸리케를 경질한 것은 슈틸리케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있고, 특히나 슈틸리케가 지도자로 실패를 거듭하는 모습만 보여서 결국 리베크나 슈틸리케나 둘 다 문제였다는 것이 중론이다.]와는 선수 관리 문제와 리베크의 [[로타어 마테우스]] 중심의 3백 전술에 반대하는 등 격한 갈등을 빚다가 슈틸리케가 물러나고 [[호르스트 흐루베쉬]]가 급하게 대체자로 오는 일까지 발생했고, 언론은 당시 [[http://sports.news.naver.com/kleague/news/read.nhn?oid=001&aid=0004342332|선수들이 훈련 도중 슈틸리케를 비웃었다는 보도]]랑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38&aid=0000011738|선수들이 마테우스에게 리베크 대신 감독을 해달라는 루머]]까지 보도했는데, 사실유무 여부와 좋지 못한 성적에 불만을 품은 언론에서 사실 이상으로 과장 보도했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대표팀 분위기가 정말로 좋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1999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주전들이 빠진 브라질에게 0:4, 축구 변방으로 취급 받던 미국에게 0:2로 참패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별예선에서 탈락했다. 당시 독일 대표팀이 세대교체 중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다. [[유로 2000]]에서는 포르투갈, 루마니아, 그리고 라이벌 잉글랜드와 같은 조에 배정되었다. 루마니아와 무승부, 그리고 포르투갈과 잉글랜드에게 완패를 당하며 1무 2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8강진출에 실패하였다. 특히 잉글랜드전은 30년 만에 패배로 끝났고, 포르투갈전은 에이스인 루이스 피구와 후이 코스타가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음에도 0:3으로 맥없이 깨지고 말았는데, 이것은 그 1년 뒤 [[한일 월드컵]] 예선전 잉글랜드와의 홈경기 1:5 참패와 함께 독일 국대 역사상 최악의 경기로 뽑힌다. 리베크 본인은 대회전 인터뷰에서 독일 축구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고 자신의 3백 전술이 시대에 전혀 뒤쳐지지 않았음을 수차례 말했으나 결국 유로 2000의 실패로 자기 발을 찍은 셈이 되었으며 리베크 본인도 시대를 못 따라간 감독이라는 최악의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유로 2000 이후 자진 사임한 리베크는 그 뒤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유로 2000의 실패의 충격으로 인해 축구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일 국가대표 감독을 맡기 전에 이미 잠정적으로 은퇴한 상황에 있던 사람을 성급하게 감독으로 선임한 독일 축구협회의 문제도 없지 않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중 유이하게 어느 대회에서도 4강에 들지 못한 감독으로 기록되었지만, 세대교체에 소극적이었던 전임 포크츠와 달리 [[미하엘 발락]], [[베른트 슈나이더]], [[올리버 뇌빌]],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등의 신예 선수들을 국가대표에 발탁하고 이들 대부분이 훗날 2002년과 2006년 월드컵에서 활약한 걸 감안하면 업적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볼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